어떤 장치로 음악을 듣고 계시는지요.
회원님들은 무엇으로 음악을 듣고 계시는지요.
제가 처음 저의 음악을 들었던 장치입니다.
중학교 시절 어머니께서 앞으로는 ‘글로발’ 시대라며 영어 회화 테이프 세트와 함께 사오신 골드스타 카세트 플레이어. 카세트 플레이어는 1번 회화 테이프가 끼워진 채로 오랜 시간 동안 방치되어 있었습니다.
카세트 플레이어를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그 해 추석 선물로 들어온 ‘봉봉’이라는 과즙 음료에 번들로 붙어 있던 오렌지 라벨의 팝송 테이프 때문이었습니다.
아직도 선명합니다. 카세트 플레이어에 테이프를 넣고 플레이 버튼을 누른 후 처음 흘러나오던 Morning Train의 경쾌한 브라스 라인과 Betty David’s Eyes의 몽환적인 신디사이저 연주. 그리고 뒷면의 The One That You Love의 아름다운 선율.
늦은 밤까지 카세트 플레이어로 라디오 팝송 프로그램을 듣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반에서 몇 등인지 모르면서 빌보드 순위는 외우고 다녔고, 레코드 가게에서 테이프에 녹음할 노래들을 고르고, 팝송 가사를 한글로 정성스럽게 써가면서 어머니의 바람대로 영어를 배웠습니다.
고등학생 때 아버지께서 거실 장식용으로 ‘전축’을 사 오셨습니다. 삼성에서 출시한 Sonorama 라는 중저가 모델의 컴포넌트였지만, 최첨단 돌비 시스템과 듀얼 카세트 데크가 탑재된 스테레오 전축은 저에게는 신세계였습니다. 덕분에 LP판을 사느라 용돈은 항상 부족했었습니다.
어느 날 라디오 팝송 프로그램의 브릿지처럼 쉬어가는 코너에서 흘러 나오던 ‘수요일에는 빨간 장미를’이라는 노래를 듣고 난 후 가요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이영훈 작곡가의 노래들, 들국화, 어떤날, 유재하, 벌거숭이, 동물원..... 그 아름다운 노래들을 LP 판에서 테이프에 녹음해 Sanyo 카세트 플레이어로 음악을 들었습니다.
90년 중반부터는 저도 CD로 음악을 듣기 시작했습니다. CD 플레이어가 있는 저가의 Inkel 컴포넌트로 다양한 음악을 들었습니다. 이 때가 제가 음악을 가장 많이 들었던 시기였던 것 같습니다.
첫 차가 생기자 가장 먼저 한 일도 차량용 CD 플레이어를 구매하는 것이었습니다. Panasonic 플레이어에 연결된 테이프 모양의 어댑터를 차량 카세트 데크에 꼽아 음악을 들으며 도로를 달렸습니다.
20세기가 끝나갈 무렵 일본에서 잠깐 생활했을 때에는 SHARP MD 플레이어로 음악을 들었습니다. 세련된 디자인과 선명한 음질 그리고 미니 디스크의 음원 저장 방식이 신문물처럼 느껴졌었습니다. 낯선 거리를 거닐면서 MD로 듣던 TUBE의 노래를 들을 때면 마치 그 시절 그 거리에 제가 서 있는 것 같은 아련한 느낌이 들 때도 있습니다.
그리고, 너무나 아름다웠던 아이폰 3GS.
유려한 뒷곡면과 아이콘 UI의 멋짐에 끌려 샀지만, MP3 기기를 써보지 못한 저로서는 아이폰에 음악을 담고 꺼내 듣는 행위 자체가 음악을 듣는 것 외의 또 다른 즐거움이었습니다. 어쩌면 Ruark을 구매한 이유도 사용하지 않던 아이폰 3GS를 밖으로 꺼내서 눈에 보이는 곳에 두고 싶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후 친구가 오디오 구성을 바꾸면서 내게 버린 마란츠 앰프와 이름 모를 스피커에 CD 플레이어를 조합해 음악을 들었고.
한동안은 몇 개의 블루투스 스피커로 음악을 들었습니다.
저는 한 때 무손실과 무압축 음원을 구별할 줄 아는 황금귀임을 자신했었습니다. 그것을 확인하기 위해 제법 고가의 Astell&Kern MP3와 이어폰으로 음악을 들었던 적도 있습니다. 그리고 제가 막귀임을 바로 알게되었습니다.
지금은 아이폰에 노이즈 캔슬링 없는 에어팟으로 음악을 듣고 있습니다. 음악을 듣는데 불만은 없지만 이어폰은 바꾸고 싶습니다.
핵전쟁으로 폐허가 된 암울한 미래를 그린 영화에서 주인공이 낡은 MP3에 연결해 음악을 듣던 빨간색 유선 이어폰을 사서 음악을 듣고 싶습니다.
무엇으로 음악을 들어도 지금처럼 즐거울 것입니다. 저는 막귀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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