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 사제 인연 다시 뭉쳤다 LG 조상현 감독과 스승 최희암의 우승 축하 만남
프로농구 LG를 28년 만에 창단 첫 정상으로 이끈 조상현 감독(49)은 모처럼 달콤한 휴식을 마친 뒤 다음 주 미국 라스베이거스로 출국합니다. 외국인 선수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해서입니다. 새로운 시즌에 대비하기에 앞서 조 감독은 연세대 농구부 시절 은사인 최희암 고려용접봉 부회장을 만나 우승 인사를 했습니다.
연세대 95학번인 조 감독은 어느덧 최희암 부회장과 인연을 맺은 지 꼭 30년이 됐습니다. 최 부회장의 눈에는 스무 살 대학생 새내기로 신촌에서 자신에게 농구를 배웠던 조 감독이 어엿한 프로 사령탑으로 우승까지 한 것이 마치 자기 일인 양 기뻐하는 듯 보였습니다. 프로무대에서 선수, 코치에 이어 감독으로도 우승을 맛본 제자의 등을 여러 차례 두드려 주더니 “축하한다”라는 말을 되풀이하더군요.
아직도 최 부회장을 현재 직함보다는 감독님으로 부르는 조상현 감독은 “시즌 때도 최 감독님과 자주 연락을 하며 이런저런 조언을 들었던 게 큰 도움이 됐다. 특히 시즌 초반 8연패에 빠져 힘들었을 때나 챔피언결정전 기간에 먼저 전화를 주셔서 팀 관리나 전술적인 부분까지 가르쳐 주셨다”라고 고마움을 표시했습니다.
조상현 감독은 스승 앞에서 쉽지만은 않았던 우승 헹가래까지 가는 과정을 털어놓기도 했습니다. 5분 늦게 태어난 쌍둥이 동생 조동현 감독이 이끄는 모비스와의 4강전이 최대 고비였다라고하네요. 조 감독은 “모비스가 LG의 스타일을 훤히 꿰고 있던 데다 외국인 선수 매치업에서도 우위에 있어 고전을 예상했다. 1차전 초반 10점 이상 크게 뒤지다가 결국 어렵게 첫판을 잡았던 덕분에 3연승으로 시리즈를 마감할 수 있었다. 만약 1차전을 LG가 졌더라면 우리가 3연패로 떨어졌을 수도 있었다.”
LG는 정규리그 1위 SK와의 챔피언결정전 내리 1, 2, 3차전을 모두 이기는 이변을 연출하며 쉽게 우승하는 줄 알았는데 다시 세 판을 내리 패해 3승 3패까지 몰려 벼랑 끝에 섰습니다. 속이 까맣게 타들어 갔던 조 감독은 “그래도 7차전 앞두고 가볍게 훈련하는 데 우리 선수들 표정이 밝더라. 특히 유기상, 양준석 등 젊은 선수들이 웃고 떠드는 모습을 보면서 힘을 냈다”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에 최 부회장은 오히려 “선수들이 철이 없어 그런 것이다”라며 농담하더군요.
조상현 감독은 중학교 2학년 때 연세대 진학을 마음먹었다고 합니다. “당시 최고의 슈터였던 (문)경은 형이 연세대에서 뛰고 있었는데 후배가 되고 싶었습니다.” 대전고 시절부터 탁월한 공격력을 보인 조 감독은 고3 때 최희암 당시 연세대 감독을 만나 쉽게 진로를 결정했습니다. 조상현 입단과 관련한 비화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최 부회장은 “상현이보다 기량이 뒤진 조동현은 스카우트하지 않으려 했다. 동현이는 애초 경희대로 가게 돼 있었는데 상현이 동현이 모친께서 하도 간곡하게 부탁해서 같이 연세대에 입학하게 됐다”라고 회고했습니다. 연세대에 나란히 입학한 쌍둥이 형제는 미국 유학 후 복귀한 서장훈, 대전고 동기 황성인 등과 최강 라인업을 구성해 연승가도를 질주하더니 두 번째로 농구대잔치 정상에 올랐습니다.
최 부회장은 모비스 감독에서 물러난 조동현의 근황을 조상현 감독에게 묻기도 했습니다. 조 감독은 “감독으로 일하느라 제때 치료를 못 받았던 어깨 수술을 했다”라고 답하더군요. 또 네덜란드로 유학을 떠났던 조상현 누나의 안부를 묻는 최 부회장의 모습에선 사제 관계를 뛰어넘어 마치 한 가족처럼 느껴졌습니다.
최 부회장은 농구선수 출신으로 보기 드물게 기업체 임원으로 장수하고 있습니다. 며칠 전에도 자신이 지사장을 맡았던 중국 대련에 해외 업무를 보려고 출장을 다녀오기도 했습니다. 학창 시절 운동만 하느라 은퇴 후 구직 활동에 어려움을 겪거나 섣불리 자영업에 뛰어들었다가 사기를 당하거나 실패에 빠지는 제자들이 누구보다 안타깝습니다. 이날 조 감독은 농구 스타로 이름을 날리다가 은퇴 후 식당을 차렸다가 얼마 못 가 문을 닫은 후배 사례를 언급하기도 했습니다.
최 부회장은 “대한체육회나 KBL(한국농구연맹) 또는 구단에서 선수 진로 교육에도 적극적인 관심을 보여야 한다. 선수들도 너무 쉬운 일에만 기웃거릴 게 아니라 용접, 중장비 운전 등 자신만의 기술을 터득하는 데 노력해야 한다. 그래야 노령화 시대에도 버틸 수 있다”라고 조언했습니다.
정상은 오르기보다 지키기가 어렵다고 합니다. 그래서인지 조 감독과 최 부회장은 자연스럽게 다음 시즌을 화제 삼아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LG는 지난 시즌보다는 다가올 2025∼2026시즌에 기대를 했던 게 사실입니다. 상무에서 제대하는 양홍석이 복귀해 전력을 더욱 끌어올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유기상의 입대도 미뤘다고 합니다. 애초 계획보다 우승 목표를 조기 달성한 LG는 타이틀 방어라는 새 과제를 안고 있습니다.
최 부회장은 “과거 문경은 조상현 같은 따짜 슈터들을 요즘은 보기 힘들다. 타이밍도 늦고 슈터에게 볼을 연결하는 가드들도 기량이 부족한 게 사실이다. 유기상은 성장 가능성이 더 커 보인다. 한 박자 빠르게 슈팅할 수 있도록 스텝이나 무릎 각도 등을 교정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라고 지적했습니다.
프로농구 10명의 감독 가운데 최 부회장이 연세대 감독 시절 가르친 제자가 조상현 감독을 비롯해 유도훈(정관장) 문경은(KT) 이상민(KCC) 4명에 이릅니다.
조상현 감독은 “연세대 선수 시절 최희암 감독님은 개별 선수의 장점을 최대한 극대화하는 데 탁월한 능력을 보이셨다. 연세대에는 뛰어난 선수가 워낙 많았지만, 특정 선수에게 끌려가지 않고 아무리 뛰어난 재주를 지녔더라고 팀 분위기를 망치는 선수가 있다면 과감하게 배제하기도 하셨다. 나 역시 감독이 된 뒤에는 그런 지도력을 따르려 했다. 연세대 출신 지도자들은 공통으로 그런 부분에서 많이 배웠던 것 같다”라고 말했습니다.
조상현 감독은 고참급 일부 선수들이 자신의 농구 철학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팀에 녹아들지 못하자 고심 끝에 과감하게 배제하고 나가는 용단을 보여주기도 했습니다. 정규리그에서 역대 최단기간 우승을 차지한 SK는 간판선수들끼리 불화에 휩싸여 경기 도중 패스도 안 하는 걸 보고 팀 분위기가 별로라는 걸 감지했다는 게 조상현 감독의 얘기였습니다.
최희암 부회장은 과거 선수들에게 “너희들이 볼펜 한 자루라도 만들어 봤냐. 너희들처럼 생산성 없는 공놀이를 하는 데에도 대접받는 건 팬들이 있기 때문이다”라는 명언을 남겼습니다. 팬이 없는 스포츠는 존재할 수 없으니, 팬들을 잘 챙겨야 한다는 의미였습니다.
조상현 감독 역시 “LG의 연고지 창원 팬들의 뜨거운 응원과 격려가 없었다면 우승이라는 영광은 찾아오지 못했을 것이다. 강팀, 좋은 문화를 가진 팀을 만들어 팬들의 성원에 보답해야 한다는 사실을 선수들에게 늘 강조한다”라고 말했습니다.
최 부회장이 몸담은 고려용접봉은 경남 창원에 메인 공장이 있습니다. LG의 연고지와 같습니다. 조상현 감독은 스승과의 작별에 앞서 다음 만남을 기약했습니다. “감독님 창원 오시면 언제든 연락해 주세요. 맛있는 거 대접해 드릴게요.”
최희암 부회장의 얼굴에 다시 한번 흐뭇한 미소가 번졌습니다.